케이크를 절반으로 정확히 나누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이처럼 케이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균형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자본주의 경제학은 시장의 존재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류가 탄생한 이래 늘 존재했고 것을 상품으로 사고파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온갖 이론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인간은 이기적이고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역사를 살펴봐도 인류는 개인의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파편적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여 그 사회를 지키려 했던 존재였다. 인류 삶의 토대는 이기적 개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얽혀서 모여 사는 사회의 공존이었다는 이야기다. 가정도 하나의 사회고 그곳에도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에도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호모에코노미쿠스가 존재해야 한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공상적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을 아예 씨가 말라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인류 본성과 한참 거리가 먼 시장이라는 착취의 제도를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다. 시장 자본주의는 맷돌처럼 사회를 통째로 갈아 인간의 본성을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의 경쟁과 자유시장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비인간적을 변했는지를 살펴보라 고대 로마에서는 검토장에서 검투 노예들이 사투를 벌였다. 패배를 당한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황제가 쥐고 있는데 황제가 엄지를 위로 올리며 노예는 살고 내리면 노예는 죽는다. 우리가 사는 사회라고 뭐가 다른가? 최저임금을 높이자는 말에 게거품을 물고 반대하고 죽어가는 빈민들과 저소득층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하자는 주장에 빨갱이 대중영합주의자의 주장이라고 일축하는 자들이 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것도 처참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시장 자본주의의 숭배자들이 떠드는 대로 시장에 자기조정 기능이 있기만 하다면 그런대로 자본주의를 봐줄 만하다고 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이란 건 완전한 기만임을 여러 차례 증명됐다. 자기조정 기능이 있다면 왜 완전고용은 늘 요원한 꿈이 된 걸까? 자기조정 기능이 있다면 대공황은 왜 벌어졌고 글로벌 금융위기는 왜 생긴 것일까? 가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짜잔~! 하고 조절된다는 주장은 인류 경제 역사의 기본만 알아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폴라니는 자본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든 것을 시장 아래 두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시장을 우리가 사는 사회 아래에 두고 인간을 보호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을 맷돌에 갈아버리는 이 악마적 자본주의에 맞서 공동의 사회를 재건하자는 칼 폴라니의 제안이 우리의 가슴에 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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